지난 시간에 이 책의 대략적인 개요와 중요 문단의 요점 그런 부분들을 좀 봤죠.
약간의 사례하고 전반적으로 좋은 내용입니다.
근데 이제 어느 학설이나 이제 이론을 보면 항상 그에 따른 비판이 따라오잖아요.
그래서 오늘 첫 시간은
세밀런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비판하는 여러 가지 내용들을 한번 살펴보고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세미얼 헌팅턴 자체를 비난하는 내용도 많이 있습니다.
이 베트남전을 보면요. 이 헌팅턴이 베트남 촌락들의 폭탄을 대량 투하하는 근거를 만들어내고 제시한 인물입니다.
헌팅턴이 수천 톤의 폭탄과 화학무기 사용을 핵심 골자로 한 정착촌 전략을 수립한 장본인인데요.
베트남전 당시의 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 여기 이제 미군의 입장에서 보면 베트공이니 올맹군이 이렇게 하지만 사실은 자기 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싸운 전사들이잖아요.
이 사람들이 이제 당연하게도 농촌에서 일반적인 내용들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눈에 가시죠 헌팅턴이 이 농촌을 초토화시켜서 그 주민들을 도시로 내몰면 지지 기반을 잃게 돼서 결국 미국이 베트공을 이길 수 있을 거다.
이렇게 판단을 내리고 기한을 올립니다.
물론 그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죠. 하지만 헌팅터는 베트남 촌락에 자행된 융단 폭격 그리고 네이팜탄
고엽제 이런 것들을 문명이라는 말로 정당화했습니다.
네이팜탄에 맞아 살이 타들어가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7살 베트남 소녀의 시신을 보면서 과연 문명의 충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진심으로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학문적인 성격을 봐도요 상당한 왜곡이 있다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이 세미얼 론팅터는 냉전이 종식된 뒤에 등장한 신세계 갈등의 근본 원인 이데올로기적인 것도 경제적인 것도 아닐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정치의 주된 갈등은 상이한 문명 집단들 사이에서 벌어질 것이다.
이렇게 주장을 했잖아요. 결론적으로 그는 문명의 충돌이 전 세계 정치의 해외 머니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명 충돌론 이런 여파로 해서요.
냉전 해체 이후 시대 제국주의 전쟁의 본질을 은폐하는 그런 구실과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학자적인 큰 성과에도 불구하고 냉전의 전범이랄 수 있잖아요.
펠리키 신죠 이 헌팅턴의 책을 두고 21세기 세계 정치의 현실을 포착하는
강력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극찬을 했습니다.
전범이 전범을 옹호한 거죠. 하지만 이 문명 충돌론 서방과 자국 지배자들에 대한 제3세계 국민과 민중들의 들끓는 분노와 그들의 일부가 결국은 자살 테러를 감행하게 만드는 현실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또 문명 충돌론 중앙아시아 같은 곳을 보면요.
석유와 천연가스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미국이 맨날 전쟁을 일으키잖아요.
정확하게는 조지 부시 때가 가장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자원 떠먹으려고 해당 사람들 죽이는 겁니다.
이 추악한 전쟁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드러내지 못했다.
이런 비판을 참 여러 학자들한테 받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명 충돌론은 모든 문명에서 갈등의 근본 원인인
계급간 투쟁을 전혀 설명하지 못합니다.
보통 전쟁을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적보다 무서운 아군 장교 아군 간부 그러니까 전쟁이 나면 평소에 괴롭혔던 사병들을 진짜 인간 이하의 취급을 했던 장교와 간부들을 먼저 싸 죽이는 행위가 전 세계 각 군에서 계속 일어났었습니다.
다만 이게 잘 기록이 되지 않았던 것뿐이죠.
그러니까 이제 다 이렇게 문명으로 뭉뚱그려 놓으니까 지배 계급의 피지배 착취를 전혀 이야기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콘팅턴의 책을 읽어보면은요 그가 문명이라는 단어를 매우 다양하게 쓰는 것 같이 하면서 혼란스러운 것을 알 수 있는데 어떤 때는 문명을 아프리카 문명처럼 지역적인 것을 표현하기도 했지만요 어떤 때는 이슬람이나 서구 그리스도교 동방 종교 이건 종교적인 구분이잖아요.
헷갈리는 겁니다.
이 정도 되는 학자가 헷갈릴 리는 없으니까 의도가 있다고 파악하는 게 맞을 텐데 어쨌든 간에 이런 아전인수격 해석이 많이 있다는 그런 내용이죠.
그리고 이슬람 교도의 폭력성과 호전성은 이슬람 교도도 또는 비 이슬람 교도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데 근거는 제시해요.
나름 비이슬람 국가들을 공격하는 이슬람 국가들의 군사화를 많이 예로 들고 있는데
그런데 실제 그 군 생활을 어떻게 이렇게 씁니까 미국이 무기 팔았으니까 그런 거죠.
사우디와 이집트 이라크 등의 미국이 판매한 엄청난 x의 무기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란 이라크 전쟁이나 탈레반 is 여기에 사실 미국의 정보기관과 미국 국무성이 작용하고 있죠 사실은 그냥 부추긴 겁니다.
권력자 a와 b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무기 팔고 자원 가져가고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거죠.
물론 미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여도 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실행한 것은 미국이니까 본인들이 한 것은 적어도 알리고 이런 비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미국의 이러한 내용은 쏙 빼놓은 거죠.
또한 이 헌팅턴을 보면은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극찬하는 아주 수구의 신보수주의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서구 문명의 가치는 민주주의 다원주의
법치주의 또 뭐 있죠 자유 이런 걸 설명을 하면서요.
이 가치가 비서구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이 비서구 사회가 서구 문명의 정신적 가치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로 1980년대와 90년대 이 비서방 국가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친서방 정권들이 쿠데타나 혁명 선거 등으로 밀려났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죠
그런데 이 주장 자체가 많은 왜곡을 하고 있습니다.
왜 전복이 되었는가 왜 밀려났는가 이 내용을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 거죠.
민주적으로 선출됐던 아이앤드의 정권을 피노체트 쿠데타로 전복했던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 정도에 이란 민중에 의해 부패한 국왕 팔레비 왕조가 없어졌는데
이 팔레비 왕조를 수십 년 동안 경제적 그다음에 이제 무기적으로 도와줬던 나라가 미국과 영국이었잖아요.
말이 안 되죠 그리고 오늘날 문제 되는 지역 중에 하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들을 추방하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했던 장본인 또한 미국이잖아요.
서방 문명 특히 미국은 비서방 국가에 개입해서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말하는 서방의 가치인 문명 즉 민주주의와 다원주의 법치주의를 무참히 짓밟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내용의 비판으로 보면요. 대부분의 내용이 이제 문명의 충돌은 없고 문명 내의 충돌만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비판이 많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역사학자죠 문명의 공존의 저자인 하라트 밀러 같은 학자를 비롯해서 많은 이 학자들이 세미 런팅턴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비판이 아니라 비난입니다. 좀 센 거죠.
그리고 역사학자 제아스 등을 보면 문명의 충돌에 반대자들이 제기하는 비판을 종합하면 우선 문명이란 단일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것인데 우리가 보통 이슬람이다.
유교다 기독교 문명이다. 이러면 실제로는 아주 다양하잖아요.
정의는 한 단어로 하지만 근데 이제 그중에 아주 일부분을 타이틀로 내세워서 문명이라고 정의하는데
이런 우울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제 알카에다를 보면 물론 교리를 확립하는데 테러가 자행됩니다.
매우 안 좋은 거죠. 하지만 이 테러를 이슬람 전체의 폭력성으로 보는 이런 잘못을 과오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세버런팅터는 이거를 그냥 밀어붙이는 겁니다.
이슬람이 굉장히 폭력적으로 보이지만
전체의 000 몇 프로 정도만이 바로 이 세력에 들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충돌이 일어나는 원인은 아주 다양하잖아요.
우리가 보통 누군가와 다투고 싸우고 할 때도 어떤 한 가지 일로 그것만이 원인이 돼서 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사전에 작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이게 어느 트리거로 폭발하는 거죠.
한 문명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집단이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면 그 충돌의 원인도 분명 아주 다양한 계급 차이 국가 차이 민족이 다룰 수도 있고요 이데올로기가 틀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동을 보면 이슬람 교도와 유대인의 문명 간의 충돌로 쉽게 이해하는데 사실은 그 이전에 많죠.
역사를 보면 구 소련의 해체 이후 많은 러시아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했고
정착촌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이스라엘 극우 세력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 집단 사이에 사회 정치적 갈등이 문명의 충돌이라는 외형적인 옷을 입은 것이죠.
그래서 결국 문화적 갈등이 무력 충돌로 이어지게 된 겁니다.
예전에도 다른 쪽에서 잠깐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아프리카에 오래된 그리고 유명한 농담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 백인이 다가와 자신들은 성경을 갖고 우리들은 땅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성경을 갖게 됐고 백인은 땅을 받게 됐다.
기독교가 중심이 된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신봉하고 있는 세미 런팅턴 지난 역사에서 기독교 문명이 저지른 만행들 예를 들어서 중세 마녀 사냥 십자군 전쟁 이런 것들을 아마 잊고 싶을 겁니다.
서방 국가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빨리 자본주의를 도입하고 발전을 시켰죠.
그리고 군사력을 키웠습니다. 결국 비서방 국가들로부터 엄청난 불을 빼앗아서 문명과 제도를 발전시키고 경제를 부흥시켰죠.
하지만 헌팅톤이 칭송하는 서구 문명의 이면에는 이런 야만도 함께 존재합니다.
장점은 크게 이야기하고 단점과 약점은 지우거나 왜곡하거나 또는 작게 처리한 부분으로 인해서 분명히 이 책은 명작이지만
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해서 책의 기본적인 얼개는 다 봤습니다.
물론 정말 기본의 기본만 본 거고요 이 책의 여러 비판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그 학문적 성찰이나 또는 미래를 예견하는 내용이나 그 논리를 설파하는 그 과정들 굉장히 우수합니다.
아니 우수한 정도가 아니죠. 그야말로 세계적인 명작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읽어보시기를 바라고요
중간에 현대 사회와 맞지 않는 부분 또 본인이 이제 미국계를 옹호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 부분만 떼어내고 나머지 부분들을 배우고 익혀가고 생각해 보면 정말 좋은 좀 공부의 시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지만 역시 어렵고 재미없는 것은 사실이에요.
대부분의 고전들이 그렇지만 이제 이 책도 고전이 되었군요.
그래서 지금부터는 이 문명의 충돌이라는 주제로 제 나름대로 역사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과 사례들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최대한 재미있게 해보려고 했는데 내용 자체가 너무 방대하고 좀 어려워요.
그래서 여러 가지로 감안해서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역사적으로 최초의 문명 간의 격돌 원래는 좀 몇몇 다른 문명들이 있습니다.
이집트 문명도 있고 히타이트 문명
대부분 비슷한 시기인데 저는 대표적으로 이 시기에 아시리아 문명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이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좁고 긴 땅덩어리를 그리스인들은 메소포타미아라고 불렀습니다.
메소는 이 두 지명 사이의 사이를 말하는 거고요 포타모스는 강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두 강 줄기 사이에 있는 지역을 지칭하는 표현이죠.
지금으로부터 약 4500년 전에
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수메르 아카드 바빌로니아 그리고 아시리아가 연속적으로 반응해서 세계사적 문명의 족적을 역사에 선명하게 새겼습니다.
이 중에 제가 보는 나라가 이제 아시리아인데요.
기원전 2500년경 이 아수르 지역에 세워진 이 도시 국가 역사상 거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상비군 즉 시민군을 출범시키면서
그 세력을 공고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기원전 1200년 경에는 당시 초강대국인 바빌로니아까지 석권을 했죠.
그런데 이 사이에 텀이 1300년이에요.
그러니까 예전에는 확실히 좀 변화가 적었습니다.
기원전 960년부터 약 350년간 아시리아는 세계에서 제일 강력하고 규모가 큰 대 국가를 이룩했는데 그 세력 확장권이 동서로는 인도에서 이집트
남북으로는 아라비아에서 러시아에까지 펼쳐졌습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산봉어리가 줄지어 선 곳으로부터 해가 지는 왼쪽 바다에까지 힘이 미쳤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었죠. 이 아시리아는 강력한 철제 문화 기반 하에 초호화 군단을 운영했는데요.
정복 전쟁을 하기에 굉장히 용이한 힘과 체제를 갖췄습니다.
19세기 중엽에 여러 발굴이 되었는데 이 아시리아의 제국 시대의 면모가 계속 밝혀졌습니다.
내용을 보면 시리아의 중심부는 이 티그리스강과 대자부강 합류점에 가까운 삼각형의 지역이었다고 하는데 bc 2500년경 도시국가로 성립된 아시리아를 정치적으로 첫 통일한 사람 아무르인 출신의
샤마시 아다드 1세라고 합니다. 이 동네에서는 굉장히 유명한데 우리는 생소하죠.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지배했는데 그의 아들의 시대 때는 바빌론의 함무라비 왕에 의해서 정복을 당합니다.
그러니까 새가 한 번 꺾인 셈이죠. 이후로 험난한 세월을 겪어냅니다.
기원전 15세기에는 미타니 왕국의 속국이 되었다가 기원전 14세기 중엽에는
히타이트왕과 손잡고 미타니를 공격해서 결국은 회복하게 됩니다.
기원전 1300년경부터는 이제 철제를 받아들이죠.
그래서 더욱더 강대한 힘을 키워서 결국은 바빌로니아를 점령해서 그 수건을 풀었고요 히타이트의 세태를 틈 타서 당시 페르시아만에서 지중해 연안 소아시아에 이르는 지역까지 모조리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원전 천년경에는
이제 메소포타미아까지 그 세력에 들이게 되죠.
이후 약간의 침체기에 들었다가 다시 이제 아수르단 2세 이쪽 나라에서는 대왕의 칭호를 받고 있습니다.
사랑 민족을 진압했고 정복 사업이 계속되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제 좀 괜찮은 왕이 나타나면은 조금 커졌다가 아니면 줄어들었다가 이런 내용들이 반복되다가요 기원전 8세기부터
이제 용감 묵상한 왕들이 연속적으로 출연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이집트까지 모든 대륙을 정복해서 일찍이 없었던 세계 제국을 건설하게 되죠.
그 뒤로 강대한 왕들이 또 계속 나타납니다.
결국은 바빌로니아 왕까지 독식을 하고 이스라엘까지 강제 이주시키고 당시에 이제 초 거대 제국을 이루어냈는데 역사는 결국 돌고 도니까요.
아시리아도 결국
세태의 길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아시리아 영토 확장 전쟁 상상을 초월한 사륙 전쟁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습니다.
특히 이 왕중에서도 아수르나 시르팔 2세 연이은 원정 전쟁에서 저항하는 도시는 완전히 파괴하고 남자들은 창에 끼어 죽이고 그리고 포로 안에서지만 살 값을 벗기는 등 아주 잔혹한 행동을 했고요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처분하는가 하면
베키 투항한 도시의 시민들은 아주 생소한 지역으로 이주시켜서 아예 이들 민족 정신의 혼을 말살하는 그런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아주 공포와 악명의 대명사가 되었어요.
그러나 이제 이 나라에는 대단한 왕이었겠죠.
전차대와 보병 이외에 처음으로 기병대를 도입했고요 전술상 그리고 군사 기술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북방과 동방으로 정복지를 넓혔는데 이후도 파죽지세예요.
시리아와 페니키아 등 여러 도시를 계속 복속시켰습니다.
이렇게 시리아는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철제 무기 무장을 한 강력한 군대 전차 이걸 바탕으로 오리엔트 통일을 위한 정복 전쟁과 팽창 과정에서의 피정복민 전체의 강제 이주 대량 학살 약탈 파괴 기타 잔인한 고국주의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강압 통치는 당연히 이제 속주들의 반란을 부채질했고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같은 당시 기준으로 선진 지역에서는 이 비인륜적 지배 강화는 과거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던 사람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그러니까 예전 기준으로 보면 본인들보다 못한 나라가 지금 힘이 세니까 잠깐 참고 있었는데 그 행동이 참 과반이다.
이런 내용이죠. 이로 인해서 제국의 생명선이라고 할 수 있는 북방과 북동부가 위태롭게 되면서
예전에 그 강대했던 군사 조직이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전반적으로 쇠락해 갔고 또 다른 나라에도 또 영웅들이 태어나잖아요.
곳곳에서 일어난 지방 군웅들의 활약으로 아시리아는 점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아시리아는 여러 유적에서 보듯이 도시 계획이나 축성에 능하였고 전투력은 아까 설명한 그대로도 워낙 훌륭했고요
전투력뿐만이 아니죠. 전술과 이제 전법 그다음에 각종 제조 기술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조각 예술 쪽이 워낙 뛰어나가지고 당시 기준으로 식물원과 동물원을 만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각종 공예품들도 거기에 가득하고요 건축적으로도 대단했고 궁전이라든가 여러 사원 지금의 기술로 봐도 정말 대단하다 싶은 내용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아시리아의 세계 정보 과연 다른 문명과의 충돌과 조우에서 무엇을 기여했는가 이렇게 말하면 전투적인 것 말고는 딱히 말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최초의 인류 인간은 아직 타 문명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권영을 베풀 그럴 연습과 준비가 되지 않았는 듯 합니다.
그래서 아시리아의 세계 정복은 곧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게 되었고요
여기에 핍박받던 사람들은 시리아에 자극받아서 전투력을 기르는 데 그 힘과 길을 소모하게 됩니다.
시리아 이후로 이제 여러 지역에서 국제적으로 또는 지역적으로 이제 타 문명 타 세력권과의 조우와 격돌이 있었지만 좀 전체적으로 보기는 어렵고요 그다음에 이제 체계적인 부분은 그리스 문명 그리고 여기에 대항하는 페르시아
이렇게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고대 그리스라고 하면은요 그리스 역사 가운데서 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한 140년대까지를 읽었는데 이제 미노스 문명 키클라데스 문명 미케의 문명 에게 문명 이런 식으로 좀 나뉘어집니다 고대 그리스를 보면 동족 의식을 많이 갖고 있었고요 부분적으로는 결합을 이루었지만
종국에는 폴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아주 독립성이 강하고 좀 개별적인 그런 문화와 체계를 이어갑니다.
당시에 이제 여러 폴리스들 간에 동맹을 맺는 형식을 취했는데 이런 도시국가 체제는 당시 세계의 다른 여러 지역에서는 주로 좀 거대한 제국이나 왕국이 형성되었었잖아요.
확실히 그리스만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이제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시절까지 유지되었는데 여기를 기점으로 이제 고대와 근대 그리스가 조금씩 나눠진다고 합니다.
보통 고대 그리스라고 하면은 이제 서구 문명의 기틀을 다지고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전역의 문화에 큰 영향을 준 문화 시대라고 보는 평가가 많은데요.
결국 그리스 문화는 로마 제국에도 영향을 끼쳤고요 이런 로마인들은 지중해 지역과 유럽의 그리스 문화를 발전해서 퍼뜨리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은 이제 언어나 정치 교육과 제도 철학 과학 예술 전반적으로 인류를 진보시키는 이런 크나 큰 업적을 남겼고요 이 지역들에서 후대의 큰 발전을 가져온
이슬람의 황금시대 서유럽의 르네상스 시대 이러한 것들을 촉발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18세기와 19세기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다양한 신고전주의 부활 운동에서도 영감을 주는 그 밑거름이 되었다는 평가가 많이 있죠.
한마디로 타문명에게 좋은 영향을 많이 주었다.
이렇게 정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문명이 발호를 하면 옆에 있는 또 다른 문명이 뭔가 싸움을 걸어옵니다.
보통은 이제 우호사절단을 보냈다가 이런저런 조건을 걸고 양이 안 차면 붙잖아요.
그래서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의 여러 내용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기원전 5세기에 동서양이 맞붙은 최초의 문명 간의 대결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 이른바 페르시아 전쟁인데요.
이 전쟁은 이제 반 세기에 걸쳐 치른 전쟁이지만 가장 치열했던 것은 기원전 490년에서 한 10여 년간 정도라고 합니다.
페르시아가 두 차례에 걸쳐서 그리스 본토로 침공했을 때인데요.
이를 기록한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보면은 이 전쟁에 대한 비중이 굉장히 크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 전투와 전개 상황을 정리해 보면 대략 이렇습니다.
먼저 이제 왜 이 전쟁이 일어났는가를 봐야 될 것 같아요.
당시에 이제 페르시아 제국 세력 안에 이제 이오니아인들이란 종족이 살았는데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중심에는 이오니아의 중심 도시인 밀레투스 여기에 아리스타 고라스라는 인물이 있었는데요.
이 반란의 기치를 내건 그는 이제 강력한 동맹군이 필요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스파르타로 처음에 가요 하지만 거절당하게 되죠.
하지만 아테네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이 두 연합군이 당시 사르디스 지방으로 진격을 해서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됩니다.
이에 다리우스 대왕이 분노를 하게 돼요.
당시에 다리우스 대왕은 매우 관대하고 능력이 출중한 역사상의 기재였는데
만약에 이제 페르시아인이 아니고 유럽 개였다.
그러면 능이 역사상 최고의 대왕의 대우를 받고도 남을 처음으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다리우스 대왕이 주력인 페니키아 함대를 포함해서 함선만 무려 600여 척을 끌고 와서 이오니아 군을 대패시켜서 반란을 진압하게 되는데 밀레투스는 함락되게 되죠.
이 아리스타고라스라는 인물의 욕심에 의해서 이 지역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큰 피해를 받게 된 것이고요 장기적으로 이 두 문명 간에 이제 큰 전쟁의 소용돌이에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됩니다.
근데 이제 다리우스 대왕이 한 번 이기고 나니까 이제 내친 김에 아주 끝을 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돼요.
그래서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서 대륙 연안에 그리스 아테네를 침공하려고 남하합니다.
근데 이제 참 운이 없어요. 도중에 이제 풍랑과 해일을 만나서 조난당하게 되는데 보유하고 갔던 병력들의 절반 이상이 떼죽음 당하게 됩니다.
힘 한번 못 써보고요 그리고 동시에 이제 진출시켰던 육군이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습격을 받아서 큰 손실을 입게 됩니다.
결국 페르시아는 그리스 원정을 중단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이죠.
그다음에 이제 2차 전투가 일어나게 됩니다.
속칭 마라톤 전투 패배 이후 절치무심하게 된 다리우스 대왕은 약 2년여가 지난 뒤에 이제 그리스 원정군을 출발시키게 됩니다.
지난번에 이제 사실 패배도 아니죠. 그게 풍랑에 좌초한 거니까 그래서 최대한 안전한 항로를 잡게 되는데
사모스 섬을 떠나서 그리스 본토로 향해 가는 이제 중간의 도시들을 모조리 점령하고 안전 루트를 개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전보다 좀 흉폭해져요. 한 번 지고 나니까 약간 거칠어집니다.
사람이 그래서 가는 도중에 걸리는 이제 적국의 신전을 모조리 파괴하고 약탈하고 아테네로 쳐들어가게 되죠.
결국 아테네의 동북쪽 지역인 마라톤 지역에서 아테네와 페르시아군은 대치하게 되는데
당시에 이제 가장 큰 전력 중에 하나인 스파르타가 제사 중이라고 조상과 신에게 제사를 지내야 된다고 출정을 안 하게 됩니다.
사실상 난리가 난 거였는데 다행스럽게도 플라타이아 지방에서 원군이 크게 오면서 페르시아 군과 싸울 수가 있었죠.
이때 아테네 사령관이 밀티아데스였는데 부대의 주력은 우측에 두고 플라타하고는 좌측 그리고 가장 약한 부대는 중앙에 두고 페르시아군이 중앙을 치게 되면 양쪽 날개에서 감싸듯이 집중 공격하는 전술을 개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중무장 보병의 밀집대형 전술로 페르시아군을 완벽하게 손멸했죠.
당시 피해를 보면 이제 확인된 것만 페르시아 군이 약 6천 명 이상 아테네군은 불과 20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때 승리의 소식을 알린 전령 필리핀 세스 40km가 넘는 거리를 아텐의 승전보를 알리고 숨을 거두니 이것이 바로 마라톤 경기의 기원이 되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이제 두 번의 전투에서 패한 다리우스 대왕
이제 완전히 화가 났습니다. 이제 전쟁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데요.
아쉽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병으로 세상을 뜨고 맙니다.
그래서 이제 그의 아들인 크세르 크세스가 집권을 하게 되는데요.
아마 이 내용은 많이 보셨을 겁니다.
멋있는 남자들의 집합체인 300 그 영화의 적국의 대왕이죠.
보통 이제 나는 관대하다 이렇게 외치면서 하잖아요.
관대하지 않으면서 어쨌든 이 대결을 하게 되는데 당시에 이제 크세르크세스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배로 다리를 놓아서 병력을 이동시키면서 남하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다리를 만든 것도 아니고 보유하고 있는 배를 이어서 다리를 만들었다.
그러면 그 세력이 엄청날 거 아닙니까 당시 헤로도투스는 이렇게 기록을 해놨다고 해요.
아무도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육상 부대에만 70만 명 기병은 낙타와 전차를 제외하고 8만 대함선 170척 소형함선과 수송선이 약 3천 척 이런 정도의 사이즈는 처음.
본다 이런 내용이 기록돼 있다고 합니다.
마치 영화에서 대군 이동의 한 장면이 그려지는 그런 이야기인데 다만 실제로 보면 예전 역사는 보통 과장되기 마련이잖아요.
그리고 전쟁은 더욱 심화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을 보면 정규군 레길러 군대가 한 50만에서 60만 좀 안 돼요 이 정도의 병력인데 당시의 인구 비례를 봐도 그러하고 그리고 이제 원정군의 모든 병력을 데려올 수는 없잖아요.
국경 수비군이나 치안에 관여하는 병력을 빼고 이 정도를 동원한다 그러면 한 100만 원 있어야 된다는 말인데 이게 말이 안 됩니다.
매우 많은 병력이다.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하네요.
이때 이제 적국인 아테네는 당시의 실력자 데미스토 클래스가 함선 200척을 만들어서 전쟁 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 연합군을 결국은 성립하게 되는데 이게 좀 힘들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육군은 스파르타 해군은 아테네가 주력을 맡게 돼서 육지 쪽 그리스 연합군은 삼마르 협곡의 진을 치게 되었고요
수구는 이제 아르테미시온 지역에서 맞서 싸우기로 결정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 연합군은 대충 한 3500명 이 중에서 가장 강한 부대가 스파르타의 정예 300명이었죠.
결국 페르시아 대군 앞에서 끝까지 길목을 잘 지킨 이 레오니다스 왕의 스파르타 군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내 전술 앞에는 장사가 없죠.
첫 번째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페르시아 육군
아테네 부근까지 쳐들어와서요. 도시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신전도 파괴하고 그동안 쌓인 울분을 마음껏 풀게 됩니다.
이에 위기에 빠진 아테네는 살라미스로 결국 도피를 하게 됩니다 한편 페르시아 수고는 아르테미시온에서 진을 치고 전투를 치렀는데요.
이때 그리스군의 기습과 여러 번의 전투로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아테네의 데미스토 클래스가
살라미스로 모든 병력을 총 집중시켜서 결전을 했고요 이때 그리스는 이 해군의 모든 것을 걸기로 결정을 합니다.
당시의 전쟁 무기를 좀 보면은요 아테네의 함선에는 청동을 입힌 충각이 달려 있는데 이걸로 이제 상대방의 배를 충돌하는 그런 전법을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부딪힌 상대방 배는 바로 난파가 되겠죠.
결국은 이제 각종 계략을 써서 살라미스의 좁은 해협으로 페르시아 대암선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충각으로 먼저 공격해서 좀 배와 배를 박치게 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의 노를 부수는 작전을 성공하게 되죠.
이게 뭐냐면 상대방 배 옆을 미끄러져 가면서 노을 부수는데 보통 이제 당시에는 사람이 노을 졌잖아요.
여러 명의 노예나 죄수나 기타 일반 군인들이 노를 졌는데 이 충격으로 대부분 죽거나 다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이 노를 부으면서 지나가는 그리스의 함선들은 일단 노를 집어넣은 상태죠 그러니까 적군에게 부상병을 만들어 놓으면 두 배로 피해가 가잖아요.
이들을 후송시켜야 되니까 어쨌든 이런 작전들이 계속 성공을 하면서
아테네 함대가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런 페르시아 함대의 패전을 해안의 산 위에서 지켜보던 크세르 크세스는 바로 도망을 가게 돼요.
그래서 유럽에 고립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부하 장수 한 명에게 권한을 주고 본인은 페르시아로 후퇴하게 됩니다.
결국에 시간이 지나서 그 장수도 사망하게 되고 페르시아는 아테네 지역에서 그리스 지역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죠.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붙은 전쟁은 결국 그리스의 승리로 끝났고요 이는 역사의 기록이 되게 됩니다.
물론 그 뒤에도 약 30여 년 동안 국지전 개념으로 지리한 전쟁은 계속되었지만요 이 페르시아 전쟁 사이즈로 커지는 경우는 없었고 결국 가장 큰 수혜를 본 것은 그리스의 아테네 결국 아테네는 이후 민주정이 꼽히는 황금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델로스 동맹을 통한 맹주로 자리매김을 했고요 하지만 이때 힘은 본인들도 많이 썼는데 얻은 대가가 너무 적다.
그래 스파르타가 불만을 품게 돼요. 그래서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스 동맹으로 결국 두 라이벌이 다시 충돌하게 되었고요 이것이 곧 펠로폰네스 전쟁입니다.
결국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나게 됐어요.
하지만 결국은 고대 그리스 세망의 원인이 되었고
이게 원래 좀 잘 물과 기름의 성격이었습니다.
아테네는 민주 정치죠 그리고 스파르타는 과도 정치입니다.
그러니까 이 전쟁은 두 정치 체제의 싸움이기도 했고 외부에 적이 있을 때는 뭉쳤지만 결국 그 위험 요인이 사라지니까 내부에서 권력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죠.
긴 기간 동안 합심해서 광대한 왜적을 물리친 연합군의 만로가 참으로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