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세밀런팅턴의 문명의 충돌 그 네 번째 시간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원래는 이 몽고 이야기가 마무리된 다음에요.
오스만트루크를 좀 할 생각이었어요. 여기 술레이만 1세라든가 터키의 국부인 케말 파샤 이런 쪽도 좀 이야기할 게 많거든요.
그런데 좀 비슷한 내용의 징기스칸 몽고를 하다 보니까
좀 임팩트가 떨어지는 부분이 있어요.
물론 그 나름의 이야기라든가 교훈 그다음에 좀 생각해볼 점들이 많이 있지만 좀 더 센 게 있었으니까 나중에 시간이 나면 하는 걸로 하고 호스만트루크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살펴볼 내용은 다들 대략적인 내용은 알지만 정확하게는 잘 모르는 아닌가요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 얘기부터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죠.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으로 스페인에서 활동한 탐험가 그리고 항해사입니다.
흔히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로 우리에게는 익히 알려져 있지만요 사실 원래 아메리카는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그런 무주지가 아니었고요 엄연히 원주민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거는 지극히 유럽의 입장이죠.
유럽인 중에서도 굳이 말하면 북유럽의 바이킹이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한 데다가 그런 자료들이 많이 있어요.
그리고 아메리카로 인식한 것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의 지속적 관계를 처음 만들어낸 사람
이렇게 표현하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콜롬버스는 근대 이후 오랜 시간 유럽인들에게는 좀 영웅 그리고 위인 아주 모험가이자 개척 정신이 탁월한 이렇게 좀 존경받는 사람이었어요.
특히 아메리카 대륙의 터를 잡고 신생 독립국가를 세웠던 미국 자신들의 건국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뭔가 좀 정통성 역사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이 문화예술계의 각 분야에서
콜롬버스를 많이 좀 띄워줬습니다. 신화로 만들고 재창조하고 상당한 공을 들였죠.
정치적으로도 이 수도를 콜롬비아 구로 명령한다든가 콜럼버스 데이 같은 것도 국경일로 있고요 아직까지 그 흔적이 미국 내 사회에 여러 가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이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독립국에도 많이 전파가 되었죠.
그런데 역사를 보면은요 콜롬버스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학살자 침략자죠 현대에 와서 시민사회 정신이 많이 대두됐습니다.
그래서 사회의 가치관 정의를 되찾는 운동의 봄이 일어나니까 원주민 중심의 아메리카의 역사 인식이 보급된 뒤로 콜롬버스에 대한 평가가 크게 떨어지게 됩니다.
더불어서 이 연구가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이 콜롬버스트의 탐험이 아주 비과학적이었고 그야말로 막무가내 식 그냥 찍기였어요.
찍기 그저 운 좋게 신대륙에 닿았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그 평가는 나날이 더 추락하고 있죠 직원은 둥글다고 하니까 서쪽으로 계속 항해를 하면 언젠가는 세계를 돌아서 중국과 인도에 닿으리라 이렇게 믿고 출발한 거죠.
지중해를 점거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을 거치지 않고 교역과 거래를 할 수 있는 새로운 루트가 필요한 당시의 여러 나라들 여기에 맞춰서 계획을 세우고 스폰서를 구해서 포르투갈과 영국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국가들의 지도자에게 지원 요청을 했던 콜롬버스 참 영특한 사람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근데 어쨌든 이 콜럼버스의 이론이
당시 기준으로도 상당히 틀렸던 이론이어서 일단 거리가 안 맞았어요.
방향은 둘째 치고 그리고 요구 조건이 꽤나 까다로웠기 때문에 새로운 땅에서 나오는 보물의 한 10% 정도 그리고 그 섬들의 총독 자리를 평생 보장할 것 기타 이외에도 많은 요구 사항이 있었다고 합니다.
동시대를 비교해 보면요. 유명한 탐험가가 또 있죠 마젤란 이 사람의 요구가 보통 보물 5%의 양도 그리고 어느 정도의 저작권 정도 여기서 만족을 했다고 하는데 콜롬버스는 그야말로 욕심쟁이 끝판왕이었습니다.
거의 뭐 날강도 수준이었죠. 하지만 어디고 구매자는 있기 마련인 듯합니다.
해양 루트의 개척이 필요했던 이사 베릴스의 후원으로 탐험을 시작할 수가 있었죠.
당시 여왕도 상당한 권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콜롬버스의 요구가 워낙에 까다로우니까 개인 사비를 털었다고 해요.
자신이 아끼던 보석까지 팔아가면서 개인적으로 후원을 해줬다고 합니다.
이사벨일스의 신대륙 개척 지원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었어요.
여왕이 콜롬버스에게 개인적 흥미를 느껴서 지원했다.
이런 설도 있는데 그보다는 당시 국제 정세가 더 설득력이 있겠죠.
구글 같은 데 이 콜럼버스를 쳐보면은요 그림 초상화가 나오는데 제가 취향이 독특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당시의 절대 권력자였던 여왕에게 남성으로서 섹스 어필할 수 있을 그런 마스크가 아닙니다.
미안하지만요 당시를 보면은 이제 레콘 키스타 레콘 키스타라는 거는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로마 가톨릭 왕국들이
이베리아 반도 남부의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회복하는 이 과정을 말하는데요.
스페인어로는 재정복 이런 말이죠. 그 이후에 스페인이 지중해 무역이 오스만트루크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로 인해서 힘들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앞으로를 생각해 보니까 답이 안 보이는 거죠.
갈수록 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영향력이 그래서 이러한 무리수가 많은
콜롬버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나 이런 내용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웃 나라를 보면요. 옆나라 포르투갈이 이제 항해 왕자 엘리크 이 사람을 필두로 서아프리카 지역을 탐사하고 개발해서 막대한 이익을 챙겼습니다.
배가 아프죠 따라서 여왕은 신앙로 개척이 이 나라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내다보았고요 사실상 이 길밖에 없다고 확신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콜롬버스의 탐험 계획과 요구를
당시 최고의 대학이었던 살라망카 대학을 포함한 스페인의 학자 층 그리고 이제 정부 부처가 격렬히 반대했음에도 밀어붙여서 막대한 지원을 했던 것이죠.
다만 여왕이 당시 남편인 페르난도 이세와는 무관하게 개인 자격으로 후원을 했던 탐험이잖아요.
그러니까 이후에 신대륙에서 막대한 이득이 스페인으로 왔을 때 덕을 보는 쪽은 카스티아뿐이었고요
지중의 무역을 업으로 삼던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은 오히려 큰 손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오늘날의 카탈류나 지방을 보면요.
스페인 전체 인구의 약 15% 대략 한 750만 명 정도 됩니다.
그리고 전체 면적의 약 6.3%를 차지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전체 경제에서 2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는 아주 부유한 지역으로 독립 성향이 강한 그런 지역입니다.
게다가 자동차와 화학 산업 등이 밀집돼 있죠 알토랑 같은 곳입니다.
여러 역사적 갈등과 언어적 차이로 인해서요.
카탈리나는 거기다 문화적 차이까지 더해서 독자적인 자치권을 누려왔는데 이 스페인 내전에서 여러 가지 피를 봤습니다.
이때 카탈루냐의 지도자들이 공화파와 좌파 세력에 합류를 해서요.
당시 독재자였던 프랑코에게 격렬하게 저항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프랑코 총통의 집권 시에 자치권이 박탈되었고 카탈리노 사용이 금지되는 등 탄압 정책을 받았죠.
이 같은 갈등이 이제 역사적으로 많이 지났음에도 오늘날에도 더욱 극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전부터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런 내용이죠.
어쨌든 간에 이런 역사적 과정으로 콜롬버스가 도달한 지점에 아메리카 대륙은 무주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미 원주민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었다.
이게 중요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콜롬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런 내용들은 전혀 옳은 부분이 아니고요 굳이 따지자면 약 1만 년 이전에 건너간 원주민들 이 사람들이 첫 발견자들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유럽 기준으로도 콜롬버스는 빌란드로 유명한
란세오 메도스 유적의 존재 그러니까 이게 바이킹의 유적인데요.
이미 아메리카 대륙에 한참 전에 도달했다는 게 입증이 되었어요.
그 외에도 아일랜드 사람들이 아이슬란드를 거쳐서 현재 캐나다 동부에 갔다던가 프랑스의 노르망디 어브들이 캐나다의 래브라도 반도에 대해 도착했다.
언급했다. 이런 기록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바스크 이쪽 사람들이요
포경을 목적으로 북미 쪽 바다로 가거나 해안 지역에 정착하기도 했고 여러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기원전 2천 년 전이죠.
유럽인은 아니지만 당시 페니키아인들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간접적인 교역을 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심지어 콜롬버스조차도 자신의 항해 일지에 기록을 남기기를 어느 이름 모를 사람이 카나리아 제도 서쪽에서 육지를 보았다.
이 내용을 기초로 나는 전진한다 뭐 이런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 최초의 개척자가 아니었다는 점이죠.
다만 이 콜롬버스의 항해는 그보다 더 깊은 경제적인 논리가 숨어 있는데요.
어쨌든 간에 콜롬버스가 첫 번째 항해 후에 엄청난 양의 금을 들고 귀환합니다.
원래 이 땅보다는 그 땅에서 채굴되는 금 또는 어떤 갑오치가 있는 무엇인가가
목적이었죠. 근데 역시 금이긴 한데요.
당시 유럽인들에게 왜 이렇게 금이 절실했는가 이게 아시아 특히 중국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리 오리엔트라는 기록을 보면은요 당시에는 이제 은을 중심으로 세계 경제가 돌아갔는데 그 중심에 중국이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 경제의 기축 통화로 쓰이던 은 이 은의 전체 유통량 중의 3분의 2가 유럽에서 아시아로 갔고요
다시 그 절반은 중국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중국으로 흡수된 은이 외부로 다시 나오지 않고 그대로 중국 내에서 사용되는 이게 바로 문제였죠.
중세 시대의 글로벌 무역은 서양에서 동양으로 흡수되는 이게 일반적인 패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좀 더 부연 설명을 하면요.
서양 서구권은 중국에서 여러 가지 사고 싶은 것들이 많았어요.
당시에 전체 유럽을 다 합쳐도 중국의 청나라
그리고 그 이전에 명나라 여기에 안 됐거든요.
근데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은 서구권에게 별로 필요한 게 없었습니다.
그냥 은을 갖고 와서 우리 물건을 사가라 이렇게 일방적인 내용이 당시 무역의 양상이었죠.
어쨌든 간에 이러한 신대륙 탐험은 당시 아시아와 중국에서 발생한 이 만성적 유럽 측의 무역 적자를 만회하기 위한 금광 탐험 그리고 은광 탐험의 목적이 컸습니다.
또 동방 무역로가 차단이 됐어요. 아까 오스만트루크나 기타 등등의 세력 그래서 직접 교역의 루트를 찾는 것도 굉장히 필요했죠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 후에 이 비이슬람권 상인들에게는 수입과 수출 모두에 최고 관세를 부과하는 등 상당히 유럽세를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원래 아까 오스만트루크를 좀 했으면 얘기가 편한데
이 한 줄 때문에 너무 많이 할 수는 없잖아요.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로 인해서 당시에 가장 물가가 뛰었을 때는 후추 1g이요 은 1g 가격과 같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엄청난 인플레죠 오늘날에는 뭐 없으면 그만인 이 후추가 당시에는 아주 위대한 향신료로 불렸습니다.
향신료의 대왕이었죠.
콜롬버스가 도착한 카리브의 일대를 서인도 제도 그리고 이 지역 사람들을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콜럼버스의 목적이 바로 이 후추 수출국인 인도가 최종 목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간에 여러 가지 내용으로 해서 콜롬버스트로 인해 바양으로 유럽 문명의 대양의 시대가 열리게 됐죠.
콜롬버스에 이어 포르투갈의 페르디난드 마젤란 태평양을 횡단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약 30년 이로써 유럽과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대서양 그리고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아프리카와 인도 동남아시아의 인도양 이렇게 전 세계가 하나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이러한 여러 개척자들에 의한 새로운 항로 곧 새로운 재원을 만들어냈고요
기존 유럽 내 여러 기득권 경제 권력 체계를 무너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미나 북미 쪽에서 보면 여러 은광에서 은이 채굴되기 시작했는데 당시 이제 유럽의 생산량을 보면 1년에 약 3만 km 정도 그런데 신대륙 발견 후에
아메리카 지역 한 군데에서만 연간 약 20만 kg 이상이 유입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은이 시중에 유통이 되면서 이렇게 돈이 많이 풀리면 당연히 인플레이션이 따라오잖아요.
신대륙의 은이 유입된 후 100년 사이에 은 가격은 3분의 1로 떨어졌고 유럽에서는 이를 은에 의한 가격 혁명이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이러한 대량의 은 유통 기존 권력층의 몰락을 가져왔는데요.
독일에 굉장히 유명한 가문이었어요. 후거 가문 오늘날도 이 이름을 따라 여러 상품과 기타 내용들이 있습니다.
원래 유럽 대륙의 은 생산량을 책임지던 가문 중에 하나였는데요.
왕실과 교회의 돈을 빌려주는 아주 알짜 사업을 독점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권력을 얻고 광산 수입을 아주 쓸어담았죠.
그런데 신대류근이 유입되면서 바로 몰락했습니다.
또 스페인도 마찬가지인데요. 처음에 이제 콜롬버스를 통해서 은혜를 가져오는 데 선봉장 역할을 했었잖아요.
그런데 이 콜롬버스는 원래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에도 자신의 탐험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왜 모두가 거절하고 결국 스페인이
이 프로젝트에 돈을 냈는가 원래 유럽 지도를 보면요.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대서양 쪽 탐험에 나서기가 좋은 지리적 위치입니다.
게다가 스페인 같은 경우는 꼭 동방 무역이 아니더라도요 기존의 재정난에 원래 시달리고 있었어요.
특히 이 북아프리카와 맞닿은 위치로 가톨릭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종교적인 부분도 추가적으로 영향을 줬죠.
새로운 땅에서 얻는 수입의 10% 그리고 무역 거래 수입의 8분의 1을 달라는 이 콜롬버스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인 이후 신대륙에서 나오는 금과 은으로 충분히 만회가 가능하다 이런 계산이 있었을 것입니다.
원래는 더 일찍 무너졌어야 되는 스페인 그러나 이 여왕의 베팅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집니다.
그래서 엄청난 양의 은이 스페인으로 쏟아져 들어왔죠 그런데 쉽게 들어온 돈을 너무 쉽게 사용했습니다.
무적함대로 불리는 해군력을 키우고 이슬람권과의 전쟁을 지속하면서 교회를 비롯한 여러 화려한 건축물에까지 돈을 그야말로 흥청망청 썼죠 이렇게 부풀려진 국가의 부채 결국 신대륙의 이 엄청난 금과 은으로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습니다.
그러면은 이제 국고가 비면 세금을 올리잖아요 소비세를 인상해서 보충하고자 했는데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지 약 100년이 지났을 무렵에는 결국 이 소비세가 오르고 올라서 3배 이상 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면은 이제 민심이 험악해지잖아요.
한참 좋을 때가 있었는데 그리고 기회도 있었고요 스페인은 이 신대륙의 금가은을 산업에 투자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요
은광이 고갈되자 결국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원래 역사의 이 전쟁사를 보면은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과의 전투에서 패했다고 나오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보면 전투 시의 전함이 부서졌다기보다는 이 전투를 계속해서 운영할 돈이 없었다.
운영비가 없었다. 이게 더 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이때 올려놓은 높은 소비세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반발
그리고 각지의 식민 지역의 독립전쟁을 불러왔고요 결국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이 신흥 해상 국가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은 이 아메리카 지역 신대륙의 금과 은이 유럽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러나 진짜 더 큰 영향을 끼치는 물건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감자인데요.
1570년 정도 경에 스페인을 통해서 유럽에 소개된 이 감자 병원의 환자들에게 지급됨으로써 식량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처음에는 약간 좀 실험용인 성격이 있었어요.
어디 한 번 보지도 못한 곳에서 새로운 모양의 이상한 작물이 왔는데 이거를 고위층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쉽사리 먹겠습니까 그러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운 쪽부터 먹기 시작해서 올라오는 겁니다.
당시 처음에 유럽인들의 사고 방식을 보면은요 이 감자가 악마의 작물로 인식이 되었다고 합니다.
나병을 일으킨다 각종 질병을 유래한다 이런 식으로 배척을 했다는 거죠.
하지만 감자가 유럽으로 들어온 지 200여 년이 된 무렵 감자는 대기근에서 유럽을 살렸고요 이 감자가 있었기에 1700년대 대기근에 이어서
산업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적절한 수의 인구를 확보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 감자와 더불어 옥수수도 유래가 됐는데요.
콜롬버스가 발견한 이 옥수수 아주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금방 스페인을 넘어서 아시아 지역까지 퍼져나갑니다.
이 감자 옥수수가 없었다. 그러면 유럽은 아마도 꽤 긴 기간 동안 식량난을 극복하지 못했을 겁니다.
실제 이러한 콜롬버스의 교환으로 유럽은
신대륙으로부터 많은 이득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대가로 유럽은 무엇을 주었는가 유명한 작가죠.
제라도 다이아몬드의 총균쇠 이 책 제목이 바로 그 답이 아닌가 합니다.
총을 앞세워서 신대륙을 정복하고요 그리고 총보다 더 무서운 전염병 역병을 통한 간접 확살 또는 직접적인 내용들 그리고 이후 몇백 년간 이어지는 점령 전쟁과 노예 무역
바로 이것들이 이 고마운 감자와 옥수수에 대한 유럽의 선물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인지언들의 복수가 바로 담배다 이렇게 우습지 않은 내용들도 있는데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대표되는 아메리카 대륙 학살이 고작 이 담배로 인한 폐암 정도로 만회가 될까 그런 의구심이 듭니다.
그리고 또 개인적으로 콜롬버스는 완전 악당인데요.
이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후에
역사가들이 지적하는 집단 학살의 원형입니다.
타이노 원주민들을 조직적으로 노예화시키고 이 과정에서 많은 수가 죽었다고 하죠.
총독으로서 콜롬버스는 노예 정책을 도입했고요 이 옥수수와 면화를 세금으로 징수하는 한편 금광 채굴 등의 강제 부역도 했고요 그리고 나머지 인디원들은 금을 가져오게 해서 그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팔다리를 자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실제로 금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많은 원주민들이 도망을 갔고요 스페인 식민지 개척자들은 이들을 사냥하는 방식으로 죽이고 또 아주 몰살 정책을 펼쳤다고 합니다.
콜롬버스의 가혹한 통치로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요.
처음에는 대략 한 80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 타이노 족의 인구가 1496년 경에는 300만 명 정도로 감소되었고요
그가 1500년경 이 청동의 자리를 떠날 때쯤에서는 고작 10만 명 정도만 살아남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치의 유대인 홀로코스트보다 더욱 파워풀하고 잔혹한 행위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콜롬버스도 대 악당인데요. 그런데 이 뒤를 잇는 무리들 오히려 더욱 흉폭하고 지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마야 문명 아즈텍 문명 잉카 문명 등이 있었는데요.
바로 차례차례 이들에 의해서 멸살이 되었죠.
먼저 마야 문명을 보면요. 고대 멕시코 지방 과테말라 지방 이쪽을 중심으로 번성한 인디오 문명 그리고 이 민족의 명칭입니다.
마야 문화가 번성한 지방은 한 3개 지역 정도로 구분이 되는데요.
그 중심을 이룬 것은 과테말라 북부의 지방부터 서쪽은 멕시코의 타바스코
동쪽은 밸리드 지방에 이르는 중앙 분지 이렇게 넓게 분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남부 지방까지 넓은 지역이 모두 여기에 포함이 되죠 마야인들은 원래 이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할 정도로 뛰어난 사람들이었고요 이 마야 달력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정확하고
독특한 달력이었는데 1년을 365일로 고정을 했고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기에도 상당히 정확한 달력이라는 평가입니다.
그런데 이제 점차 환경이 변화하고 또 같은 곳에 같은 농사만 짓다 보니까 지력이 쇠퇴해요.
옥수수 농사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너무 좀 심한 화전과 벌목으로 인해서 산림 파괴가 계속 일어납니다.
그러면 세락하게 되죠. 그리고 지배층은
나라를 잘 살려야 되는데 정신을 못 차리고요 쓸모 없는 전쟁과 인신 공약을 하다가 주민들의 반란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중국에는 스페인의 침입으로 완전히 멸망하게 되죠.
이 시기 이 지역 주민들을 보면은요 대부분은 왕족 그리고 귀족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좀 본인들의 호위 의식을 하는 종교 지도자들 이들로 인해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지옥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럽 세력의 이후 가혹한 취급도 오히려 기존에 본인들 지배 계층들이 하던 짓에 비하면 그리 심하지 않은 수준이라는 내용도 있는데 유럽 세력이 대 악당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요 그보다도 더욱 악마 같은 지배 계층들의 만행은 차마 눈 뜨기가 보기 어려운 그런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아주택 문화가 특히 심했죠. 아주택을 보면은요
이제 마야 문명 다음에 13세기 15세기 경에 멕시코 중앙 고원에서 번성했던 마지막 고대 인디언 문명입니다.
주로 옥수수와 양파 등을 재배하는 화전 농업의 기반이었고 근데 이제 생각보다 전투력은 강했다고 합니다.
도시와 사회조직 정치기구가 잘 정비돼 있고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고 그리고 신권 정치를 행했다고 해요.
그래서 힘이 있으니까
주변 부족과 국가들을 복속을 했겠죠.
여기까지는 다른 나라들과 비슷합니다.
이 부족들의 연방제 토지 공동 소유 그리고 중미와 북미 사이에 장거리 교역으로 날아가 결국 발전하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요. 이 아주택 제국의 종교가 다신교였는데 당시에 가장 유명했던 태양신 여기 섬겼어요.
근데 이 태양신에게 인신 공양을 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그런 종교죠 아주택 제국의 인신 공양이 마야 제국에 비해 크게 유명한데 이 사제가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적군 포로 아니면 여성의 가슴 여기를 이제 돌칼로 베어내요 끔찍하죠.
심장을 꺼내서 재단에 바치고 이 시체는 피라미드 계단에서 굴려서 아래로 떨어뜨려 죽입니다.
그리고 시체를 식인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이때 의식에 사용되는 여성 태양신께 자신을 바치는 행위로서 인신 공양이 끝나면 죽는 거죠.
그다음에는 이제 여신으로 추앙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추앙받는다는 의미도 잘 모르겠고 내가 죽고 나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리고 이게 이 지배 계층의 공포 정치 그리고 신의 이름을 팔아서 국민들을 억압하는 여러 가지 내용들
그런데 절대로 왕족과 신을 모신다는 이 종교 지배 세력의 가족들은 그 의식에 사용되지 않는다고 하네요.
예나 지금이나 동서고금 어떤 역사적 기록을 봐도요 지배 계층의 행동은 비슷합니다.
어쨌든 끔찍한 내용이고요 이전에 마야 제국의 인신 공양이 1년에 한두 번 하는 제사 정도였고 왕이 신에 대한 존엄을 위해서
살에 상처를 내고 자해하고 일장 연설하고 이 정도 수준에 그쳤다면 아주택 제국은 아주 규모도 컸고요 인신 공양 제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서 나라 자체가 엄청 공포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물을 바치기 위해서 본인들이 이제 지배하고 있는 식민 부족들에게 할당량을 정해줬고요 억지로 끌고 와서 이렇게 계속 제물로 바치는 거죠.
이것이 이 나라의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아주택의 피라미드 지하에서 보면 해골 탑 그리고 사람들이 수백 수천의 뼈가 발견됐고요 광범위한 인신 공양 학살 식인이 있었다는 증거들이 많이 출토됐습니다.
보통 백인들이 정복지의 정복 주민들을 학살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주택 제공만큼은 이 백인들이 정복해줘서 차라리 다행이다.
이런 내용까지 느낌까지 가질 정도입니다.
이러한 내용 때문에 아츠텍 제국은 휘아의 식민 부족들에게 할당량을 정하고 거짓 소문을 내서 서로 싸우도록 이간질하고 분열시키고 유도시켜서요.
이렇게 보면 이제 국민들은 그냥 사육당하는 거죠.
목장에서 소 키우는 거랑 비슷합니다.
전쟁은 제사에 바칠 제물을 사러 가는 그런 개념이었을 뿐 아닐까요.
그러니까 이런 나라가 존재 가치가 있을 것인가 또 이런 지배 계층을 살려둘 이유가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이 아지텍 제국이 각 부족 지도부를 회유하고 세뇌 교육하고 아주택 제국의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서 반란을 억제했는데 이 노예를 제외하고는 어쨌든 교육 체계는 잘 갖춰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교육이 대부분 현대 개념의 교육이라기보다는 전쟁
그리고 국가의 충성심 주입 종교 교육 세뇌하고 통제하는 그런 내용이었어요.
이런 사악한 설계로 잘 짜여진 국가 시스템이었기에 부족민들이 반기를 들 생각조차 못했고요 그래서 아주택 제국은 주변 부족민들의 증오를 엄청나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회만 노리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대륙 내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이 변수인 스페인 침략자들이 나타나면서 이 악마의 사이클이 깨졌고요 결국 아즈텍 제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제도가 있었죠. 역사적으로도 대부분 그랬지만 이 조선시대의 신분 제도 태어났는데 부모가 노비면은 나도 노비입니다.
그러면 나는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고 잘생기고 그리고 뭔가를 할 수 있어도 평생
저 덜 떨어진 저 양반과 자재의 수발을 들어야 됩니다.
이 꽉 짜여진 이 반상의 구분을 좀 없애고자 들고 일어나면 삼족을 멸해버렸죠.
이게 나중에는 구족까지 갔습니다. 그러니까 저쪽에 어디 누군가의 친척에 있었던가 없었던가 그런 가물가물한 사람이 반역을 일으켰다.
나까지 가는 겁니다. 무서운 사회죠 이런 사회는 빨리 없어져야 됩니다.
오늘날 일부 학자들이나 아니면 유교에 관련된 여러 직업을 가진 사람들 종교 관련 그런 내용들 갓 쓰고 도포 쓰고 나서까지 하는 경우는 많이 없어졌지만요 옛날 조선의 얼을 이어가야 한다 우리의 뿌리를 잊지 말아야 된다 이런 소리를 하는 걸 보면 정말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게 올라옵니다.
아무튼 뭐 그렇고요 어쨌든 이 인신 공양을 처음.
본 스페인 정복자와 당시 이들을 따라온 선교사들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유럽의 경우에는 이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기독교의 생명 존중 사상이 좀 기본이잖아요.
실제로는 이상한 사람들에 의해서 여러 가지 다른 내용도 있지만 어쨌든 간에 예전에 있었던 잔혹한 인신 공약이나 악습은
벌써 사라진 지 몇백 년이 됐었기 때문에 겪어본 적이 없었어요.
그 충격이 굉장히 컸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정복자 코르테스인데요.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 이 황금으로 가득한 제국을 찾으며 원주민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협상이 가능하면 좀 말로 금을 뜯어내고
협상이 불가능하면 무력으로 정복한 후에 금을 얻어내는 이런 방식으로 계속 진군을 합니다.
아주택군이 인신 공양을 위해 설상용 전쟁이 아닌 몽둥이를 들고 포로 잡기용 전쟁을 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유럽의 단련된 이 전투 그리고 압도적인 병기를 앞세운 스페인 군의 상대가 안 됐죠
스페인인들은 상대적으로 굉장히 소수임에도 총과 말 강력한 강철 갑옷 뭐 이런 내용으로 원주민들을 쉽게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주민 전사들의 여러 무기들 이 강철 갑옷에 상대도 안 됐죠 처음 보는 이 총과 말 군견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하얀 피부의 사람들 500만 인구의 거대 제국 아주택이 힘도 못 써보고 점령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더 많은 금을 위해 코르테스는 계속 서진했고요 아주택 제국에 반감이 컸던 핍박받던 부족들 잔인한 아주택군을 제압하는 이 백인 침략자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이런저런 정보를 제공하면서 아주택 정복을 도왔습니다.
코르테스는 결국 이 수도 지역에 도착해서 당시 아주테 황제 몬테수마에게 아주 격렬한 환대를 받는데요.
당시 황제가
일반 사람들과 비슷하게 하얀 피부의 코르테스 일행이 하늘에서 내려온 신으로 착각하고 잘 대해주었습니다.
근데 이제 환대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는 곧 마술을 드러내죠 이 몬테수마를 인질로 잡고 아주택 제국 관리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아주택의 우상을 파괴하고 황금을 계속 가져가는데 이 정보 상태가 계속되자 밖에 사람들도 이상함을 눈치채고 경력을 모아서 포위를 해요.
끊임없이 수만 명 이상이 몰려들었기에 아무리 무기가 우수해도 힘들겠죠.
결국 탈출하기로 했고 그동안 모은 것을 잘 챙겨서 도망을 가는데 그 중간에 신전에서 인신 공양하는 피해 의식을 보고 아주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원래 코르테스 나쁜 사람이 맞는데 아주택 사제들은 태양신을 기쁘게 해주려면 수천 수많은 사람의 심장을 재물로 바쳐야 한다 이 정도면 살려둘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결국 도망치던 코르테스는 이 신전의 대포를 발사해서 이 의식들을 다 엎어버리고요 의식을 나눈 사제와 병력들을 모두 총살시키고 이 의식의 제물로 바쳐질 뻔했던 약 1만 명의 아주택인들을 살려내서 집으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이후 자초지종을 자세히 들은 고르테스가 사비를 털어서 당시 스페인에서 돼지 30마리를 가져왔고요 결국 이 나라의 피해 의식을 금지시키고 이후에는 돼지를 길러서
제사에 사용하게 했죠. 이후 몇만 마리 이상으로 불어나게 됐다고 합니다.
어쨌든 간에 이 코르테스가 학살당한 이런 내용들을 본국에 보고를 하고 호소를 해서요.
증원군을 청해 왔고요 그래서 전열을 가다듬어서 다시 아주택 제국을 공격 이전의 부족들을 포섭하고 원주민 병력을 지원받고
스페인에서 온 인원까지 추가하고 이래서 결국 나라는 점령하게 됐는데 그런데 이때 천연두가 엎어지게 돼요.
전혀 면역인자가 없었던 원주민들이 바이러스에 대량 학살당하게 됩니다.
어쨌든 간에 이건 나중 문제고요 결국 이 동맹 부족들 수백 년 동안 아주택의 인신 공양에 학살당한 원한이 워낙 강했기에
아주택인들을 거의 모두 학살해버립니다.
결국 1521년 아주택 제국을 무너뜨리고 멕시코를 건설한 코르테스 이후 도독에 임명돼서 한동안 왕처럼 편히 잘 살다가 사망하게 됐다고 합니다.
이 코르테스가 이제 죽기 전에 유럽으로 돌아왔는데 이때 유럽에 처음으로 초콜릿 카카오죠 이걸 전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쓴맛이었다고 해요. 지금도 이제 100%에 가까운 오리지널 카카오를 먹으면 단 게 아니라 쓰잖아요.
그래서 여기에 간을 맞추기 위해서 설탕을 첨가해서 이제 오늘날의 초콜릿이 탄생하게 됩니다.
정복자 코르테스 이 원주민들을 야만인이 아닌 신중히 대해야 할 존재로 봤고요 그리고 가톨릭 신앙과 완전히 대칭되는
식인 풍습이라든가 인신 공양 풍습만 빼면 나머지 현지 풍습은 고치려고 하지도 않았고 비교적 정복자 치고는 강압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코르테스가 압도적인 전력차에도 아주택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이유였죠.
곧 현지의 민심을 얻었다. 이렇게 정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웅이자 학살자 그리고 정복자이자 구원자인 코르테스
참으로 여러 가지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나름 원주민들을 구한 공로도 있기에 정작 멕시코 본토에서는 그에 관한 평가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 합니다.
어쨌든 아주택 제국은 이 멸망 이후 스페인인들에게 영향을 받아서 대거 가톨릭을 받아들였고요 그래서 오늘날까지 중남미는 대부분 가톨릭 교를 믿게 되는 그런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미의 잉카 제국 이제 좀 비슷한 내용의 반복이니까 짧게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이제 좀 독특한 동물이 하나 있죠.
라마 중남미 지역은 라마를 제외한 거대 동물이 없었기에 바퀴나 수레 같은 이동 수단은 발명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잉카인드는 정밀한 태양력을 사용했고요 고산지대에서는 계단식의 밭 그리고 수도 시설까지 사용하면서 문명을 발전시켜 왔고
잉카의 길이라는 고대 로마 도로 같은 우수한 도로망도 건설했습니다.
아주택 제국처럼 대규모 인신 공약은 안 했지만요 어린아이를 재물로 바치면 국가 재난을 막을 수 있다.
여겨서 1년에 수십 명씩 희생되는 그런 내용은 반복됐습니다.
잉카 제국은 신전을 새로 하나 지을 때마다 대량으로 어린 아이들을 죽여서 파묻었고요 이런 것 때문에 주변 민족들의 반발을 사는데 역사란 어쩌면
약한 자에게 행하는 강한 자의 기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이제 등장하는 사람이 이제 피사로인데요.
아주 잔혹한 사람입니다. 이 잉카 황제 아타오 알파가 원래 10만 명 정도의 군사가 있었는데 이 피사로의 한 170명 정도도 안 되는 군에게 아주 몰살을 당했습니다.
정확히는 협약을 맺자고 만났다가 납치돼서 이후에 형편 없이 밀리게 된 것이긴 하지만요
어쨌든 이후 이 황제를 처형하고 임시 괴래황제를 앉힌 다음에 결국 본국으로부터 물자와 인력을 받아서 이 나라를 멸망시킨 피사로 이때 병력과 물자를 전달받은 곳이 바로 병력 운용이 편리하다는 이유로 이후 중요 도시로 개발이 됐고요 오늘날의 항구 도시 리마 페루의 수도죠 이게 건설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비슷한 내용이 반복됩니다. 피사로의 잉카 정복으로 유럽인들은 남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어마어마한 금가은을 유럽으로 보냈고요 아까 얘기했던 대로 가격 혁명이 일어나고 물가 급등하고 자본가가 생겨나고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이런 내용의 연속이죠.
그런데 당시에 이 피사로가 이전에 코르테스와는 달리 이제 악마로 여겨지고 있는데 다만 당시의 잉카 제국을 보면은요 다주택이 워낙 세게 해서 그렇지 이쪽도 만만치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인신 공양의 그 규모가 좀 작았을 뿐이고
그러나 지배지의 부족들을 착취하고 그리고 아주 굉장히 무서운 내용 많아요.
잉카인들끼리 사람의 가죽을 벗겨서 인간 북을 만들거나 해골로 술자를 만든다거나 이런 잔인한 일로 내부 분열이 계속 이어졌다고 합니다.
즉 마야 문명 아주택 문명 잉카 문명 이런 국가들을 보면요.
유럽 국가들에게 일방적으로 희생당한 그런 이미지가 있는데 실상을 보면 선한 국가들이 아니라 다만
더 강한 자에게 굴복한 작은 권력의 악당들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여튼 이 중남미와 라틴아메리카 문명들 스페인과 유럽 세력들의 군사 정복으로 식민지화 되었고요 나라 전체가 학살당하고 전통 문화가 급격히 파괴되게 됩니다.
당시 백인들의 학살보다 무서웠던 게 이 백인들이 유럽에서 가져온 전염병들 아까 얘기 많이 했죠.
감기 같은 인플루엔자의 기본적으로 면역이 있던 백인과 다르게 라틴아메리카 온 주민들은 이런 병 자체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무공해 같은 신체였는데 한 번 휙 도니까 나라 전체가 절단이 납니다.
무참히 죽어 나갔고요 인구가 급격히 감소를 했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후에 사회적인 영향을 한번 보면은요
이 라틴아메리카 서쪽 지역은 이제 에스파냐 동부는 포르투갈이 지배했는데 둘 다 가톨릭이잖아요.
그래서 가톨릭교와 스페인어 포르투가로가 대륙 전체에 퍼지게 됩니다.
또 이후에 이제 노동력이 부족하니까 흑인 노예들이 강제 이주되어서 아프리카 문화가 또 섞였고요 여기에서 이제 백인과 흑인 그리고 기존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좀 오랜 시간 같이 하면서
혼혈 인종이 나타나요. 그래서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배웠던 내용들 현지인들은 좀 싫어한다고 하는데 백인과 인디언의 혼혈인 메스티소 그리고 백인과 흑인이 몰라토 인디언과 흑인이 삼보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합니다.
근데 이 내용이 그렇게 좋은 내용이 아니에요.
여기서는 구별하기 위해서 한 거고 실제 이런 내용을 쓰면 매우 힘든 상황에 처하실 수도 있습니다.
중남미가 이제 원주민 문화와 백인 문화가 섞이니까 아주 정열적이고 화끈한 그런 성향이 강해지게 되고요 그리고 이제 가톨릭교의 영향을 받아서 피임을 하지 않으니까 기본적으로 좀 인구가 많아지는 아기를 많이 낳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이쪽 지역을 보면 굉장히 경치가 장관이죠.
영화에 나올 법한 이런 아름다운 배경에 이국적이고 화려한 라틴 아메리카 문명들
그 실상을 보면 이런 무시무시한 이면이 있었고 참으로 끔찍했던 과거가 있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옛날 놀이동산이나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올 법한 해골바가지 정글 그은 보아 이런 좀 환상적이고 신비한 이야기도 많고 과연 이것이 실화인 것인가라는 수준의 그런 전례동화 같은 내용도 많았던 이 대양의 시대 그 초기의 이야기들이 바로 이 역사입니다.
이후 라틴 아메리카는 유럽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요 북아메리카에서 이제 미국이 일어나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패권을 잡았잖아요.
그래서 미국은 우리도 유럽에 관여하지 않을 테니까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카 지역에서 물러나라 이렇게 협의를 하게 되고요 그게 잘 안 되니까 이제 전쟁까지 치르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제 시간이 흘러서 점차 라틴 아메리카는 새로운 세계의 패자로 떠오르던 영국 그리고 미국의 지원 등에 하나 둘
독립하게 됩니다. 결국에 오늘날에 이 지도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죠.
지금까지 이 책을 읽고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본 제 나름의 결과는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어딘가를 여행하다 누군가를 만난다 그러면 보통 경계는 하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좀 가벼운 인사를 하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인연을 맺고 헤어지고 이것이 일반적입니다.
여행을 할 때 보통 이렇죠 예전 시대에는 먹고 사는 것이 화두인 시대 물론 지금도 그 본질은 변함이 없지만요 그런 시대였기에 아마도 지금보다는 서로 뺏고 뺏기는 과정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보다는 조금 더 적대적이었을 수도 있죠.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보자마자 칼을 들이대고 목숨을 거는 싸움을 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탐색하는 시간 정도는 갖죠. 게다가 일단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이렇게 개인 간의 만남에서는 큰 일이 별로 벌어지지가 않아요.
그러나 국가 단위로 다른 국가 문명을 만나면 인간은 흉폭해집니다.
빼앗고 부수고 몰살시키죠 그리고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간에 아니면 두 가지가 모두 고려되거나 결국 전염병이 퍼집니다.
이것이 예전에 타 문명권과의 전쟁 대왕의 시대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오면서 일반화된 공식이고 우리는 이것들을 합쳐서 역사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난 제 느낌은 이렇습니다.
문명의 충돌이 아닌 권력의 충돌이라고 말이죠.
다른 나라와 문화 문명을 몰살하라고 가져온 분은 우리 국민 서민의 것이 아닙니다.
권력자 층의 계로 들어가고요 사회 인프라